나는 오늘도 미국에 있는 형제들을 생각하며 용서하지 못함을 회개하고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마 5:7)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함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약 2:13)
긍휼을 베풀면 긍휼 함을 받게 되며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면 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는다(마 6:15).
공동체는 서로가 다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같다는 것을 확인해 가는 곳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랑 받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감사가 나온다. 그래서 내 이웃 또한 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이 잘못했을 때 용서할 줄 알고 그들이 고통 받을 때 다가가 위로해 줄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영광이요 최고의 기쁨이시다. 그리고 사랑을 받은 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되고, 이웃에게는 긍휼함이 된다.
최고의 긍휼은 이웃에게 전도하는 것이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 육신의 정욕과 싸우고 남을 용서하면 어떻게 든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를 맺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선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나의 공로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가능하게 된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좋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 또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품안에 거할 때 비로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믿음의 좋은 나무임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 7:21)
우리 안에 증거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좋은 나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가 덮어진 사람이다. 그 큰 사랑을 받았는데 우리 안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좋은 나무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귀중히 여기지도 않는다. 절절한 기쁨, 회개를 느끼지도 못한다. 그런 사랑을 받고도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위선자이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 하여 주었거늘…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2-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그를 넘기리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음행하는 자, 도적이나 탐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늘나라는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6:9-10)
사랑과 용서, 온유와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사랑에 깨어져서 하나님의 용서의 달콤함을 붙든 자에게 주어진다. 용서하려고 인간적으로 노력하고 분투하는 것이 우리를 깨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육신에 거하는 한 용서나 사랑의 선행에 불완전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불완전함을 덮어 주시기 위해 오셨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사랑 밖에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마찬가지이다. 내가 불완전한 사랑 밖에 줄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이웃에게도 불완전한 사랑밖에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용서하게 된다. 그들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나 여전히 육신에서는 죄성이 흘러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예수님의 긍휼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이것들과 싸워야 한다. 내 스스로는 이길 수 없다.
오로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 하나님, 오늘은 미국의 형제들에게 전화해서 먼저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저를 붙들고 인도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