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간단하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3장 14절에 의하면 당신과 함께 있으시고 싶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체포되는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실 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막 14:32-34) 그러나 그들은 잠들어 있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 14:37)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에 취해 곯아 떨어졌다.
억울하게 재판 받으시고 모욕을 당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함께 하지 못했다. 모두 도망가고 베드로 혼자 예수님을 따라갔으나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었다. 알지 못한다고 하고 오히려 저주까지 하였다. 함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시몬이 도와드렸다. 시몬은 베드로의 옛 이름이지만 구레네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베드로가 아니었다. 십자가 상에서 수난 당하실 때에는 그나마 없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 또한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함께 있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라는 것이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다.
그러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자기가 살려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3년동안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몰랐다. 죽어도 살리라. 죽으면 살리신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고 고백하였지만(막 8:29) 지금까지 생각해온 유대인의 메시아이시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로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해 줄 화려한 메시아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니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을 그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고 그를 꾸짖으셨다.(8:34)
뒤늦게 그들은 성령을 받고 대다수 순교하였다. 말씀대로 따라 갔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먼저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유대인과 같이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알려 주고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게 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성령이 오시기 전의 제자들과 같이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둘째, 함께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직업으로, 남은 여정을 보람 있게 사는 방법의 하나로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배와 그물 등 생계수단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눅 5:11)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고난이 없는 신앙은 종교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주님의 부르심은 나를 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르심의 취지에 합당한 고난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고난 중에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 과연 무엇인지 조용히 묻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기를 원한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오신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동역자가 필요하고 그래서 교회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각 지체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천국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교회 공동체로 부르고 계신다.